개인 적인 것들/글 들..ㅠ.ㅠ

<딘편> 40대의 히피 -1972년작-아직은 정리중

흰머리사자 2016. 2. 27. 19:14

1972년 작품 - 대학을 졸업할 무렵 글

그 당시에는 통금(통행금지)이 있어 모든 생활이 10시쯤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던시절..

소주보다는 막걸리를 튀김과 함께 즐겼고  72년 가을인가 청년문화 기수였던 최인호씨가 복학하여 다작과 함께 별들의 고향을 연재였고, 김민기놈으로 시작하는 LP음반이 나왔고, 고전 음악감상실이 종로에 <르내상스> 청계천에 <아폴로> 명동 구 내무부 앞에 <훈목다방>  하드락 감상실은 신촌쪽에 1-2개 있었음.

 150원이 있으면 담배 청자인가 60원 커피값 30원 교통비 조금.. 하루를 사는데 별 지장없었구.. 졸업 할때 대학등록금이 5만원대 였던것으로 기억

 대학을 입학하던 1969년은 참 세계적으로는 안정적시기..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 미국에서는 히피들의 축제 우드스탁 훼스티발이 열렸구..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의 <내일을 향해 쏴라 -원제가 BUTCH CASSIDY AND SUNDANCE KID> 비틀즈가 있었구, 월남전은  말기로 반전운동이 곳곳이.. 우리나라는 박통이 10년째 독제 - 사람들이 길들여지던 시기. 아- 10월 유신이란게 발표되며, 72년 10월에 위수령... 장발단속 거리에서 머리 길면, 경찰이 잡아 머리를 깍아버리던 시절.. .

 

 

 

 우리는 그들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처럼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한 녀석이 운영하는 아뜨리에를 이용하여 글자 그대로의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고 또 그들처럼 뚜렷한 철학도 지니고 있었다. 10시가 넘은 시간에 그림을 배우는 아이들이 돌아간 후에야 한 녀석씩 모이곤 하였는데 그곳에는 기다리는 친구가 있어도 없어도 좋았다.

 그 안에는 언제나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사랑이 평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머니가 허락하면 오징어다리 몇 개와 소주 한 병쯤을 사가지고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 잔은 받아도 받지 않아도 좋았다. 우리에겐 권한다는 사치는 필요없었다. 그 안에서는 서로의 간섭이 필요없는 아니 간섭이 필요 없는 행동만이 허락되었다.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할 수도 책을 볼 수도, 물론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고 원한다면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 아뜨리에는 제멋대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화실의 두 벽이 붙은 곳에는 칸막이가 있었고 그 안에는 두 개의 야전 침대가 놓여 있었다. 네녀석이 다 모이는 날에는 화실의 소파와 의자가 총동원 되어 2개의 잠자리를 더 마련되었고 누가 침대고 누가 의자인지는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지었다. 칸막이 안쪽에의 벽에는 요란 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는데 서로의 기호에 따라 가운데는 12호 캔바스위에 오일로 그려진 우드스탁 훼스티발의 심볼인 '기타 위의 비둘기' 그림이 걸려 있었고 주위에는 그림 대형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친구가 갖고 있는 레코드원판 사이에 끼어있는 그랜드 훵크의 실황중계 사진은 웃옷을 벗어제치고 알몸으로 땀방울을 튕기며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들은 넷이 하는 보칼사운드를 셋이서 최소의 멤버로 메꾸려는 듯 더욱 요란을 떨며 연주하고 있었다. 밥 딜런의 키타와 하모니카를 합주하는 흑백사진 패널, 비틀즈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도 구별을 했다. 정말 싫은 일이지만 우리가 몸담고 또 처해있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사회가 그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처럼 생활하면서도 자유스럽지 못했다. 허지만 탓하지도 속상해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서의 만끽이 더 이상의 쾌감을 우리에게 주었고 서로를 어루만져 줄수 있는 유일한 상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구룹을 형성하면서도 동일점을 지니기를 싫어했다. 동일점은 상처 하나로 족했다. 획일화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머리모양만 해도 두녀석은 귀를 덮었고 나랑 한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단속이 심할 때 모자를 뒤집어 쏘고 다닐지언정 도저히 머리를 깍을 수는 없다고 하는 녀석을 우리는 욕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  동일점이 있다면 그것을 티브의 뉴스나, 사진에서 보는 전쟁터에서 시달린 그들 군복의 피스마크는 전쟁에 지친 반전(反戰)이라는 실감을 느끼게 하지만, 거리의 크리닝을 주어야하는 군복의 피스마크는 좋아했을지언정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주어지지 못하는 사치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NOT WAR, MAKE LOVE... MUSIC, LOVE, PEACE 세상에 전쟁을 없애고 그것이 꼭 그리스도적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간의 사랑 만이라도 원한다는 그들의 외침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그런 생활이 6개월도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모처럼 퍼붓는 눈을 맞으며, 아직은 10시까지는 시간이 남아 아니 그냥 술이 마시고 싶어 근처 단골 선술집에 들어섰다. 나는 한쪽구석에 앉아 양 허벅지로 드럼통의 훈기를 느끼며 막걸리 반되를 거의 비워가며 시간을 물으려 뒤돌아 남루한 회색코트를 입고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10시가 좀 넘었는데....' 하며 불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팔목을 쳐다보는데 그는 분명 내 중학교 때의 농구부 코치였다. 정말 우스웠다. 그를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꼭 7년만이었다. 그의 소식은 단편적이나마 끊임없이 전해 듣고 있었다. 그때 농구부 애들은 만날 때마다 그를 화제에 올렸는데 내가 듣기로는 운동구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늘 내게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그와 나의 관계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운동부 코치들은 서로 나의 큰 키가 탐이 나서 눈독을 들였는데 많은 망설임 끝에 가장 달콤하게 꼬인 그의 말에 농구부를 들고 말았다. 언제나 연습 때에도 내게 한번이라도 신경을 더 써 주었던 그였다. 1학년 2학기 가을 대회에는 신입생으로는 유일하게 스타팅멤버로 기용되었다. 내 포지션은 입에 익은 장신센터 그대로 센터를 맡았고 그런 대로 해내었다. 그는 시합이 끝나면 승부에 관계없이 늘 격려해 주었고 나는 덕분에 으쓱거리며 연습에 임할 수 있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어린 나이의 나는 2,3학년선배들의 눈총을 멋모르고 받아넘기곤 했다. 언제나 내 뒤에는 코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 집에도 몇 번 초대되었고 또 집에서 나의 시합이 있는 날이면 거의 빼놓지 않고 구경와 계신 것도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중학교의 선수 생활은 언제나 코트 밖에서 물을 떠다 주거나, 코치가 실수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자기 팀 선수가 5반칙으로 퇴장 당해서라도 자기가 한번 코트에서 뛰어보았으면 하는 그들보다는 퍽 순조로웠다. 그러던 그였다. 나는 남들이 한참 자라는 중학교시절을 맴돌았고 말았다. 이유는 그 뿐은 아니었다. 그래도 몇 학교 선수를 제외하면 센터로는 작은 키가 아니었다. 1학년 때도 3학년을 제치고 센터로 뛰었으니까. 3학년에 올라섰을 때 농구부에는 새 멤버가 1학년 신입생이외에 3학년에 스카우트라는 이름으로 편입생이 하나 들어왔는데 그는 교장인지 이사장의 친척이라는 소문이 있는 녀석이었다. 더구나 그 녀석은 학급도 우리 반으로 편성되어 내게는 모든 면에서 달갑지 않은 인상을 주었고 또 늘 내 눈 밖에 나는 행동을 그런 행동을 거리낌없이 해내었다. 그때까지 농구부에서 아니 선수로서 나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났다.

 언제부터인지 그 녀석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 시작하였다. 시합에 임하면 침착하고, 슛도 정확하고, 리바운드 위치 선정도 좋다고, 코치 말대로라면 모든 장점은 다가진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팀은 전국대회는 말할 것도 없고, 지역예선조차 우승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석이 들어오고 나서 말이다. 2학년 때는 전국 4강을 2번이나 들었는데, 졸업한 초 일류급이란 수식어가 붙어 다니던 가드를 보던 주장형이 역할을 대단했지만. 그가 하필이면 센터로 들어섰는지 오히려 키는 1-2센티나 보다 작았는데, 3학년에 올라와서 처음에는 코치는 나를 딴 포지션으로 기용해주었다. 포드로도 간혹 더블 센터로 하지만 변명이지만 익숙하지 못했고 적응력이 뒤떨어졌다. 3학년의 선수생활은 고등학교진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데 바뀐 포지션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초조하게 만들었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3학년의 후보는 한심했다. 더구나 그 벤치는 지루하고 초조해 숨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프고 컨디션이 나쁘다는 핑계로 연습을 빼먹는 날이 잦아졌고, 그러다 추계대회 예선 탈락하고 며칠 후, 난 그 녀석을 흠씬 패주고 나서 그 농구부를 그만두었다. 그때 마음 속으로 때린 것은 그 녀석이 아니라 코치였다.   //정리중

 

 그도 나를 알아보았다. 그는 같이 앉자고 하더니 내게 술을 권했다. 우리가 합석을 하여 다시 막걸리 한 되를 시키자 일하는 애가 와서 아저씨 더 마셔도 되겠냐고 묻는 모양이 이미 그의 주량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든 나는 시작이었고 그는 한잔도 채 들기 전에 화장실로 갔다. 잠시 후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로 돌아와 앉았는데 코트 깃에 토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내 빈 술잔에 어렵게 다시 따라주었다. 그는 이제 좀 나아졌다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빠르다고, 우린 정말 어렸을 때 만났었다고 혼자 넋두리처럼 읊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몰랐고 들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당신,' 하고 이야기를 꺼내려다 멈칫했다. 그에게 당신이란 단어가 술자리라고 해도 과한 것 같아서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바꾸었다. 그는 힘들여 눈을 뜨고 있는 듯한 표정을 치켜올린 코트 깃 사이로 보이며 괜찮다고 어차피 나이 같은 것은 져버려도 된다고 했다. 이젠 지쳤다고 역시 사람은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한다고 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 다음 다음해 봄, 자기도 그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결국은 학교재단 이사회에서 농구부 해체하란 이야기가 나와 먼저 사표를 내어버렸다고 하고는 눈을 다시 검벅 거렸다.

 '자네 내 이야기 듣고 있나?' 하며 담배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졌다. 나는 내 담배를 권했다. 그러자 그는 어려워 말고 자네도 한 대 태우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술집은 노동자차림의 손님이 대여섯이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전주가 있었는지 술상이 차려지기 전부터 취기를 부리며 '두만강 푸른 물에..' 를 시작하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고 나는 술을 마셨다. 다시 따르던 주전자가 잔을 못 채웠을 때 그는 '여기 한 주전자 더-' 하고 소리를 쳤다. 내가 그만 하자니까 걱정 말라고 오늘은 정말 취하고 싶다 고하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버티었다. 아줌마가 직접 새 주전자를 가져오자 마저 잔을 채워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젊음이 내게 한번 더 와준다면-'하고 말을 하려다 가는 큰 트림과 함께 다시 화장실을 찾았다. 뒷자리에서는 젓가락장단에 박자를 맞추어 합세한 아줌마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구슬픈 노래를 시작하였고 그들은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다시 내 앞자리에 와 앉았다. 그는 미안하다며 냉수를 찾으며 말을 이었다. '이봐 젊다는 것은 생에 한번이야 물론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 자네 내가 이런 말한다고 비웃지마. 또 내가 취해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웃어 넘기다뇨, 안 그래요. 말씀해보세요.' 솔직히 나는 그의 이야기가 궁굼해지기 시작했다. '흔히 일생에 세 번의 찬스가 온다고 하지. 사실 그렇지 못해-. 어쩌면 단 한번의 찬스도 주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어, 자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어?' '예, 말씀하세요.' '정말이야 내게는 돌아볼 기회가 없었어. 자네도 외아들이었지. 우습지, 그 외아들이라는 게 날 이렇게 만들었어.'하며 그는 다시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빼어 물었다. 나는 성냥을 그으면서 불울 붙여줄 때 그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충혈된 눈에서 볼 수 있었다. '이젠 늙었어 나보다도 자식새끼 마누라 걱정이 앞서니 이전의 자유로운 생활이 있었으면..'하고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다는 듯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자네 지금학교 다니나? 그러니까 6년인가 아냐 내가 그 학교를 그만 둔 게 6년이니 7년 되었군. 몇 학년?' '3학년예요 일년 까먹었어요. 그럼 지금은 뭘 하세요.' 얼떨결에 그가 운동구점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아무 것도 안 해 그냥 놀아.' '운동구점 한신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응, 그거 그래 그거 하지 해.' 그는 이내 휴하고 한숨을 몰아쉬고는 나를 비웃는지 자기를 비웃는지 모를 야릇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내게 '그 후에도 농구했나? 보이진 않더군." 아뇨 아무래도 소질이 없는 것 같아서 실력도 실력이고 그래서 그만 두었어요.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소질이 없는 것 같아.. 그는 두 세 번 뇌까리더니 어쩌면 다행일 지도 모르지 하며 다시 냉수를 시켰다. 소질이 없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 편입생을 흠씻 패주고 나서 교무실에 불려갔을 때 그가 사내녀석이 질투는 무슨 질투, 실력이 문제지..하며 교장과 많은 선생님들 앞에서 한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다행일지도 모르고 정말 그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 난 역시 소질이 없었다. 농구뿐 아니라 운동에 순발력이 부족했고 끈기 남들이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만약 계속 했다면 지금쯤 어느 실업단 -그것도 힘들었겠지만 코트에서 아니 코트보다는 벤치에 앉아서 구경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언제나 마음 조이며 옛날의 그들처럼 코치나 감독이 실수해서라도 기용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그 편입생의 등장은 내게는 십자가를 대신 메어준 구세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취기가 올랐다. 시간도 무척 지난 것 같아 시계를 찾았다. 또 담배도 떨어진 것을 느꼈다. '아줌마 여기 담배 한 갑이요.' 하자, 일하는 애가 와서 '무슨 담배요?'하고 묻는데 '아- 내게 담배 있어.' 하고 주머니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꺼내 권했다. 그래도 사오라고 했다. 그는 다시 '나 잠깐만 하더니,' 화장실을 가려는지 일어서려다가 상위에 있는 술잔을 쳐서 엎지르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토하기 시작했다. 한참이고 토했다. '아저씨는 그만 드시랄 때 그만 먹지' 하고 투정을 부리며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부축해 그 술집을 나섰더니 눈이 언제부터 내렸는지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나오자 마자 다시 토하기 시작하였고, 나는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12시가 다 된 모양이었다. 거리에 차도 사람도 없이 그냥 눈만 퍼붓고 있었다. 그를 데리고 아틀리에로 갔다. 그날따라 아무도 없었다. 잠긴 열쇠를 열려고 그를 벽에 기대놓고 있는 동안 찬바람에 정신을 차린 듯 집에를 가봐야겠다고 했다. '12시인데요. 곧 통금예요.' '그는 시계를 보더니 벌서 12시야... 여긴 어디야.' 하고 나에게 물었다. '친구 화실예요. 그는 그냥 여기서 주무시죠.'하며 문을 열고 층계로 올라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뒤따라 쫓아 올라왔다. 불을 켜고 의자를 내놓고 앉기를 권했다. 연탄을 방금 갈고 가서 인지 가스냄새가 가득 차 창문을 열고 있으니까 그도 창가에 와 몇 번 심호홉을 하더니 언제부터 눈이 내렸지 하고 내게 물었다. 난로 옆에 의자를 내놓고 앉기를 권하며 새 담배를 뜯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여기서 사나? 재미난 곳이군, 미대 다녀?' 하고 계속 물었다. '자네는 어째 머리가 짧군.' '길러도 보았지만 간수하기 귀찮아서요.' '아냐 그냥 해본 소리야. 아까도 말했지만 젊었을 때는 꾀를 부리면 안 돼 젊다면 젊은 사람처럼 살아야지. 또 솔직해야하고 아니면 나처럼 낙오자가 되고 마는 거야.' '어떻게 커피한잔 드시겠어요?' '별로..' 하다가 이내 '그래 한잔 마시자.' 하였다 나는 주전자를 난로 위에 얹으려다 그냥 전기곤로를 켜고 그 위에 얹어놓았다. '젊다는 얘기를 자꾸 해서 미안한데 내가 느끼니까 좀 뭐 해도 들어둬.' 이내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참 어리석었지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지 젊은 건 현실하고 타협하지 않는 거라고, 현실과 타협. 우습지 나도 그 말을 알고 있었는데. 현실과 타협이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쯤은 어떻게 생각하나?' '안 하구 살 수 없는 것 아녜요.' '물론이지 하지만 정도의 문제겠지.. 자네 미대 다니나?' '아니요.' '그럼.' '영문과요.' '좋은데 다니는 군.' '그런 것 같아요. 젊다는 것은 우린 사랑하고 혁명뿐이라고 말하거든요. 어쩌면 아까 말씀하신 현실과 타협을 모른 다는 말하고 같은 것 같아요.' '혁명이라니?' 나는 기다렸다는 듯 한번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혁명은 데모스트레이숀을 말하는 게 아니고, 세대차예요.' '세대차?' 역시 그는 우리 언어에 익숙해 있지 않아 설명해주기로 했다. '전에 이유 없는 반항이란 말이 유행했죠 그들-나이 먹은 사람들이 여차하면 쓰던 말 말예요.' '그래 영화도 있었지.' '예, 제임스 딘과 나타리 우드가 나온 , 그 영화는 청바지하고 빨간 잠바 밖에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했어요. 사실 그 영화는 서양에서는 2차대전이 끝나고 그 때 젊은이들이 듣던 이야기죠. 이제 그걸 우리가 들으니 그 만큼 눈으로 보는 문화와 생활은 다르다는 이야기죠. 이야기가 이상해지는데요, 음- 뭐야, 왜 이이야기를 시작했죠.' 이야기는 꺼냈지만 나도 취기가 있어 횡설수설하다 보니 말을 잊었다. 그도 생각이 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물 끓는 소리가 들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를 두 잔 가져와 권하면 두 손으로 잡고 마시는데 생각이 났다. '아- 세대차였죠.' '그래 맞어. 혁명이 어쩌고-' '예, 그때 많은 젊은 사람들의 행동을 기성세대들은 하찮은 이유 없는 반항이라고 했죠. 기성세대가 보기에 이유가 없었죠, 젊은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죠.' '당연할 지도 몰라요. 그런 감정이라는 것은 젊은이들만의 전쟁 후에 생긴 공통된 감정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사회참여를 거부하고 부정하기에 이르렀죠 아까도 말했지만 혁명하니까 데모를 연상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보다 그 방법조차 거부한 그들이었죠.' '나는 얼마 전 들은 전후문학을 바탕으로 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 감정은 도저히 나이 먹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 느낄 수 없는 그것이 세대차에서 오는 거라는 거예요.' 그는 잠시 말없이 담배를 다시 피워 물더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하며 말을 이었다. '나도 나이 먹은 사람 중에 하나지만 사실이 그래 이해할 수 없을 꺼야 그들은 살기에 바쁘거든 이런 말도 있지. 이론과 실제라는 쑥스러운 말이지만 사회는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대로는 아니야. 사실이야 나도 그것 때문에 이 모냥 이 꼴이 되었지.' '그렇지만 젊은이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에요. 아까 말씀하신 현실과의 타협하지 않는 거, 그들마저 그러지 않는 다면 그것도 문제죠. 그럼 누가- 하는데 그가 말을 가로챘다.' '맞어. 그 이야기야 자네는 그러지 말게 나도 학교 다닐 때 교수가 젊음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거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 어느 미친 녀석이 타협하면서 살아가겠냐고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은 거지. 허지만 나도 사회에 발을 내딛고 3년이 안 가더군. 내가 교과서에서 배운 중학교에서는 시합용 기술보다 기본기에 충실해야한다는 믿음은 사라지고, 우선 시합에 이겨야 교장이 좋아하고, 그래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생각 밖에 안 떠오르더군. 지면 전에 이긴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하는 내가 우습군.' 나도 그의 솔직함에 약간 당황감을 느끼며 무슨 이야기를 이어야 좋을지 몰라 주춤하고있으니까 남은 커피를 마시며, '커피가 식었군 우리 커피 한잔 더할까?' 하며 자네도 한 대 피우게 하며 불을 붙여주었다. 나도 서늘함을 느껴 커피물을 다시 데우려고 일어서서 창문을 닫고 라디오를 조그맣게 틀었다. '정말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아니 전부가 아니라도 나쁜 일에만 이라도 타협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쎄요 저라도 그려야겠죠. 남에게 바라느니 제가 뛰는 게 났지 않겠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남들은 한참 나이라고 하는데 벌써 인생이 끝나 가는 것 같으니..' '왜요, 다시 뛰시죠.' 그는 피식 웃어 보이더니,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무엇인가 있단 말이야. 그들이 쳐다보는 눈이 무서워. 아니 그보다 지금 새삼 시작한다는 것이..' 하며 담배를 길게 내뿜었다. '안 그렇잖아요. 가장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른 거란 말도 있잖아요.' 어줍지 않게 그를 위로하려하자 그는 다 안다는 듯 다시 웃어 보이더니,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아니 그럴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이젠 나이가 많데. 비싼 등록금 치르고 늦게 깨달았지. 참-.' 나보다 그의 당면 문제였고 나보다는 더 많은 생각을 했을텐데 하는 생각에 미치자 주제 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마음은 스물로 돌아와도 몸은 그렇지 않고 인정받는 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지 몰랐어.' 그가 넋두리를 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이해가 가고 안가고의 문제는 이미 떠났었다. 나이 많은 그가 어린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안되어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마 내가 초라해지잖아, 해주지도 못할 생각, 그런 것은 이론에서의 선한 행동 마음이지 고맙기는 하지만 아니야.'

 그도 횡설수설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때 전쟁이 끝나고 전후문학이라는게 있었거든요. 미국의 비트족, 영국에서는 엥이리 영맨, 가까운 일본에는 태양족이란 게 있었죠. 2차 대전에 죽은 이들은 결국 젊은이들이고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전쟁을 일으킨 그들은 살아남지 않았냐고, 그들은 저마다 젊음을 빌려 사회참여를 거부하고 그들이 맡는 세상이 올 때를 기다리며, 그 때 이유 없는 반항이란 말이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지금은 그들이 기성세대가 된 지금 말입니다. 히피라는 새로운 무리가 나타나니.. 젊은이들의 행동을 누구보다 이해해야 하는데..' '히피라는 무리가 월남전 반대 운동을 벌리고 그들은 골머리를 썩히고 .. 그게 세상인가 봐요.' 나는 내가 아는 지식을 총망라하여 그를 감싸려고 이야기를 했다. '맞어, 자네 이야기는 아까 뭐라고 했더라 세대차? 아닌데..' 얼른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흐음- 뭐더라.' 그도 술이 아주 깨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은 찌푸린 이마를 빼어 놓고는 아주 맑았다. '그래, 혁명이란..' 말하고는 말을 끊었다. '그래 혁명이 생각나니 또 하려는 이야기를 잊었네..왜 이러지.' 허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 언제나 새로 나타나는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 반항하지 정말 이유가 있던 없던 간에 기성세대로는 도저히 이해 못하는 그런 이념들을 갖고 말이야. 자네가 히피면 떠 자네 자식은 또 반항하겠지 어떤가 그게 혁명 맞나? 그러면 자네는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나?' '글쎄요. 자신은 못해도 성의 있는 태도는 보이겠죠.'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닌가. 어째던 자네는 행운아네 그건 걸 다 알고 있으니? 또 젊고..' 나는 공연히 민망해 동지의식으로 한마디 건넸다.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는 이내 받아들이지 않고 이내 되쏘았다. '글쎄 난 똑똑한 척하고 그냥 기성세대로 뛰어들었어. 그 결과는 요 모양 요 꼴이고, 그들 기성세대가 물러나갈 때 나도 덩달아 도매금으로 나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이야, 그들이 물러나고 나서 젊은애들이 들어오면 경험을 가지고 그 위에서 또 한번 살 줄 알았지, 제 무덤을 자기가 팠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고..' 그는 모처럼 소리내어 껄껄거리며 웃었다. 나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곤로위에 놓인 주전자가의 끓는 소리가 들렸다. 컵을 두 개 꺼내 커피를 타고 설탕을 넣고는 주전자를 들었더니 물은 끓다 못해 졸아서 한잔도 채우지 못했다. 그를 쳐다보고 웃으니 그는 물을 좀더 붓고 끓이지. 하고는 길게 기지개를 폈다. 그는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네도 그림 그리나?' 하고 물었다. '가끔이요.' '어디 자네 그림은 없나?' 나는 이젤 위에 놓인 며칠 전 그리다 놔둔 석고데생을 가리켰다.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네에게 미안 한데.하고 새삼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다시 내 그림과 앞에 놓여있는 석고상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저게 비너스인가하고 물었다. '아뇨, 그건 쥬리앙예요.' '그럼 비너스는?' '그 옆에, 옆에 꺼요.' 나는 왼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설명했다. '어째 비너스보다 쥬리아-, 뭐?' '쥬리앙이요.' '그래, 쥬리앙이 더 예쁜데.' 나는 쥬리앙은 코가 좀더 길고 좀약이고 가볍게 생기지 않았냐고 그렇지만 비너스는 흠잡을 데 없고 볼에 살이 알맞게 오른 것이며 전체적으로 복과 정이 흐르는 것 같지 않냐고 장황하게 설명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가 이내 긴 하품을 다시 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였다. 나 역시 피곤했다.<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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