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적인 것들/글 들..ㅠ.ㅠ

임시로 저장하는 성당지기 원본

흰머리사자 2013. 2. 10. 13:50

우선.. 아래 첫 칸에.. 설명을 했지만..


예수성심 대축일에 만난  김항식 안드리아님은 625쯤에.. 19살 용산신학교 4학년 학생이셨단다.

  - 625가 터지고. 성당지기를 하다. 928 수복 전 인민군이 청년들은 징용으로 끌고가기때문에..

   성당 앞 오래 전의 본관건물 마루바닥을 뜯고 굴을 파서 그 안에 3개월을 계셨단다.

   덕에 폐결핵을 앓으셔서..  진주.. 부산으로 신학교가 옮겨가고 

  전쟁후 ..집으로 돌아가 치료받는 바람에.. 신학교를 마칠 수 없었단다.

...  성심학교 이전의 궁굼한것들을 해결해 주실 것같아.. 욕심내어 기념관 지하 카페에 모시고 갔다.

 가다가 카메라가 필요할 것 같아.. 잠간 교무실에 들러 필기구 노트.. 그리고 선물해드릴 상본을 찾아..
 나오니.. 성당앞.. 예수성심상 터를 보시며.. 예전에 이곳이 신학교.. 우물터였다고 알려주신다.

 몇개는 손에드신 책 <신학교 이야기들>의 그림과 엮어 이해를 돕는다..ㅠ.ㅠ ..

 ..노가다..  각 그림은 클릭하면 조금 큰 사진이 나온다..ㅋㅋ 

 

        

 

  김항식님..^^  이 할아버지는 70대 후반이시다.
  점심 먹고 산책중.. 할아버지를 한 분 뵈었는데..

  손에.. <신학교 이야기들>을 들고 계셨다.
   어이가 없어.. 어케.. 그 책을.. 하고 묻자..  

  용산신학교에대해 잘 알지.. 625사변 때 성당지기였는데.. 

 하신다.

 <성당 지기...>

 

   난 625 쯤에.. 없어진

 성당의 14처와.. 성당 내부 기둥에 있던 성물..

  작은 동산의 성모동굴(마사비엘 굴)..
 사라진 삼위일체로 보이는 스테인그라스... 

  김대건신부님(AK)의 유해.. 등

 

 궁굼한것들을 해결해줄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1)  <성당 안 벽의 14처> 

 

   .. 안타갑게도.. 피난내려가기 전(50년 10월)까지는

 그냥 그 곳에 있었단다.

  / 전쟁끝나고.. 서울로 오지 않아 모르신단다.
  

     - 그러면서 김대건 신부님 유해 가 혜화동 신학교로

  옮겨진 걸보면.. 그때 신부님들이 아실지도..  

  

   언젠가.. 서울교구에 문의 해보아야겠다.

  성심 50년 동안 무관심이 아쉽다.

  - 허긴 없는 상태에서 성심학교가 시작되었테니까....
      

 

 


 

 

 

- 김항식님의 <성모동굴(마사비엘 굴)에 얽힌이야기>
  

    625가 터지고  이재현교장신부님, 백남창, 조인환신부님,

  수녀 2분 인가 남고 모두 피난을 갔는데..
  

   성당 안에 있던 김대건 신부님 유해가 혹 손상될지 몰라..

  그 성모동굴 앞의 화단의 땅을 파고 그 안에 드럼통을 묻고

  신부님 옷으로 채우고 안에 김대건 신부님유해를 모시고

  다시 덮어..    교장신부님이..

 김대건 신부님은 두번 땅에 묻히셨다고 했다며..
   그래서 그 곳은 한국 가톨릭 성지와같은 곳이였는데..하며

  혀를 차셨다...ㅠ.ㅠ


 

 ...없어진것은 1992년인가.. 지금의 커다란 새 학교건물이 

 지어지고 어느날.. (김재숙 수녀님이 교장으로 계실때.. ) 
   포크레인 차가 들어왔다.. 마침이 수업이 없어서 그 현장에

 나갈 수 있었다. 그날도수녀님께 왜 없애시려하시냐구.. 
   동창들의 추억도 얽혀있고..  (나도 그때만 해도.. 가치를  

  크게 느끼지 않고 단순했다) 중지 할 수 없냐고 했을 때 
  수녀님 말씀이 언제가는 없앨꺼고..   앞에 뜰이 시원하게 

 보이지 않겠냐고 하셔.. 또 이미 결정이 났다고 하셨다.ㅠ.ㅠ

 

클릭하여 크게 보면

성당 벽면 양쪽에 중간에 조각상이 보인다.

 

 

3) <성당내부의 기둥에 놓여있던 성물>- 아랫그림 참조   

  오른쪽이 성녀 잔다르크 (알고 있는 프랑스 여걸?)

  왼편이 돈보스코 성인 이였단다.
      - 이것 역시 14처와 마찬가지...ㅠ.ㅠ


    <예전 스테인그라스의 파손..> - 50년 10월 전 :


  세개의 스테인 그라스 

 중앙이 예수님.. 양쪽이 베드로와 바오로 였는데..

 어느쪽인지는 기억이 안난다 하셨다.

 교장신부님은 625 이후에도 매일 미사를 드렸는데.. 

 파손은 전쟁 중이니 포탄이  소리가 종종 났었는데..
  어느날  성체봉양 중..

 가까이 포탄 떨어지는 굉음과 진동이 있으면서..
  스테인그라스가.. 흘러내리듯 무너져 내렸단다.

  - 이후  한 동안은 하얀 그냥 네모모양의 바둑판식 창)

정말  예전 성당 그대로인것이 신기하다.

 

 

임신부님은 1907년생..

1917년에 신학교 입학..

34년에 사제서품 받으심

  김대건 신부님 유해는 엉뚱하게도  성당 안 재대의 아래쪽에

 있던 것이 아니고..    재대 쪽을 바라보고 

  오른쪽 벽면(벽돌을 파서)에 함같은 곳이 있어 9일기도때는

  꺼내서 기도를 하고 다시 넣어두고 했다고 하신다. 
 

 또.. 성당을 지을때 입구(성수물이 있는곳) 들어가며 오른쪽

  구석 마루 바닥에.. 흰대리석에 AK를 세겨 그 곳 아래에

 유해가 모셔져 있었고..
 시점(時点)은 조금 이상해도.. 초기에 그유해의 두개골 부분만 

 이곳 원효로성당(예수성심성당)에 모셨고..
  유해의  나머지 부분은.. 교황청을 비롯한 모든 성지..수도원

 등 으로 보내 졌다 하셨다. 
 

  그럼.. 이곳에 계셨다는 유해는 뭐냐고 다시 여쭈었더니..

이미 두개골을 안장한 금색의 유해함이었더고 하시는 걸 보면..
  유해가 바닥 대리석 밑에 있던 시점은 성당이 지어진 1902년 쯤을 뜻하는 것같고.. 
  / 그후에..두개골 부분과 각 성지로 나뉜것이 있었던 것...
  미리내성지에 김대건 신부님 유해가 있었다는 이야기와는...

 조금 더 자료 를 검토 하겠음..

 

 

이 조각상도 약 100년이 되었는 걸로 알고 있다.

아직도 그자리에 있는데 너무 조그마해서 잘 눈에

띠지 않는다...ㅠ.ㅠ

 

  언젠가도 설명한 < 예수성심과 말가리다 성녀 >

                    -예수성심축일이 여기로부터 시작한다.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 수녀와 예수 성심

  1674년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꼭수녀가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성심을 열어 보이시고 죄인들의 냉담과

 배은망덕을 탄식하시면서 "적어도 너는 온갖 힘을 다하여 죄인들의 배은을 보속하라"고 부탁하시면서, 그방법으로 자주 영성체하고 매달 첫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성시간을 가질 것을 가르쳐 주셨다.
 1856년 비오 9세는 성심축일을 전세계 교회축일로 확대했고,  1899년 레오 13세는 전인류를 성심께 봉헌하였다.

1956년 비오 12세는 "Haurietis aquas(하우리에띠스 아꽈스)" 라는 칙서를 통해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 교회가 가지는 실질적인 신앙 고백의 전부다"고 했다.

 1969년 전례개혁에서는 예수성심축일을 대축일로 정하고

 성신강림 후 둘째 주일(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난 금요일에 지키도록 함으로써 성체의 신비와 예수 성심의 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깊이 천명하였다.

 

- 사진 출처 : <노사제가 만화로 남기는 신학교이야기들> 임충근신부님 글..그림

 

 

  예전 삼위일체 스테인그라스(?: 내가 구별하려 붙인 이름)가 있는 성당사진을  바올로회 수녀님들로부터 받았는데..   

그 바오로수녀원이 예전  -밖에서 학교 교문 바라보고 왼편에 있었고.  오른편에는 성모병원 분원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얽혀졌다.

<<외전>>

   나의 외숙모님의 외삼촌을 뵈었을때 성심학교에 근무한다니까..  본인이 625전에 그 곳 병원에  잠시 계셨다며..  그 당시 김구선생님이 잠시 그 병원에 계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2층 그 병실에는 학생이던 본인과 수녀님 한분만 출입이 가능했고...
    김구선생님이 학생은 공부를 해두어야지.. 안하면 후회한다는 말씀을 직접 들었다고 한 기억이..

     오른쪽이 병원터를 설명을 들으며 떠올랐다.


 <유령의 집> 터 
      그분은 그곳을 목수깐이라고 부르셨다.. 목수일을 할수 있는 창고였다고.. 그 당시에도 있었다고..

  단상 몇 가지..  운동장은 지금보다 훌씬 작은 밭터 였고.. 옆에 장덕호, 덕필 형제신부님 댁이었다고

                       성심수녀회가 오고 학교를 세우며... 병원자리를 헐고 운동장으로 넓힌 듯..

                        성당 안의 김대건 신부님초상화는 장발님( 장면박사의 형?)의 작품이라고 하시는데.. 
                         또 누구는 .. 예전 학교 미술선생님.. 본인이 그렸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하니..

                          / 언제 그림의.. 사인을 확인해 봐야겠다.

-- 우선 잊어버릴까봐 기록을 정리해 놓는다. / 6월 23일

 

아- 그 분은 예수성심축일을 맞이해 예전 신학생시절.. 그림속의 글에 있는 것처럼..

신학생시절.. 예수성심대축일에.. 성당에 촛불 켜던 생각이 나서 모처럼.. 들러보신거란다..
온김에.. 관구장수녀님을 뵈러갔다가 출타 중이셔서.. 옆방의 어떤 수녀님께.. 책<신학교이야기들>을 한권 얻어 내려가던 중이라며..

 

<뱀발> 카페에서 수련님이 그분이 식사를 안하셨고 빵과.. 맛난.. 냉커피를 주셨다.
            담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나와 그 할아버님은 너무 신나하며  이야기를..나누었단다..^^


              / 5교시 수업만 없었으면... 조금 더 성당 안에서 예전 성당에 대해서도 설명을 더 듣는 건데..
               조개껍질모양의 성수대..는   예전 그대로네 하시다가.. 좀 바뀌었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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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한달 전... 지난 5월 개교기념일에..

그것도  30년 근속식이  25일이 아니고.. 22일 6교시에.. 그 날  개교기념미사 중에 있었다.

 

1979년...  29살에..  성심학교에 와서..  올해.. (벌써 &  이제) 30년이나 되었다.

나는 꿈도 야무지게.. 30년 근속하면,..

그 수많은 제자들로부터.. 정말 많은 위로와 추카를 받는 줄 알았다...

-- 얼마나 훌륭한 교사를 해야지.. 그런 대접을 받는지는 모르고.. 그냥 시간 만 메꾸며 되는 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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