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순 수녀 장례 미사 2011.2.1
고 김재순 수녀님 장례미사 - 강우일 주교님 강론-
우리는 오늘 우리 모두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김재순 아녜스 수녀님과 이 세상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보내드리기 위해 모여왔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김 수녀님과 관련된 많은 아름다운 기억을 지니고 그래서 더욱 김 수녀님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시리라 믿습니다. 나도 김 수녀님과 비교적 오랜 교분을 나누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1980년 대 후반부터 나는 성심 학교법인 이사회에 동참하면서 김 수녀님과 만남을 갖게 되었고 그 후 가톨릭 대학과 성심여자대학의 통합을 위한 준비를 함께 하면서, 그리고 통합된 후의 가톨릭 대학에서 함께 일하면서 많은 대화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함께 일하면서 정말 명철하시고 여러 분야에 해박하지만 동시에 아주 겸손하시고 활짝 열린 수녀님이시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심여자대학교 총장을 하시다가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으로 스스로 낮아지면서 통합된 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겸손하게 봉사하시는 모습을 돌이켜 회상해보면 시간이 갈수록 더 존경의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학교 일 때문에 자주 상의하고 말씀 나누고는 했어도 수녀님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별로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웅산 테러에서 돌아가신 김재익 대통령 경제 수석이 수녀님 동생이고 아우의 불행한 죽음 때문에 수녀님이 많이 힘들어 하셨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수녀님은 그 밖의 가족 이야기, 집안 이야기를 거의 안 하셨던 것 같습니다. 수녀회 안에서도 별로 안 하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일단 수도자가 되면 교회 공동체에서 봉헌된 삶을 살기 때문에 과거의 개인적인 일이나 육친과의 관계도 접어두는 것이 관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수녀님의 수도회 회원들을 위해서 남기신 회고록을 읽어보니 김 수녀님이 가족 이야기, 집안 이야기를 잘 안 하신 것은 가슴 속에 가족과 관련된 상처가 너무 커서 그 상처를 자신도 건드리기 싫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 수녀님은 6.25 때 아버지와 오빠 셋, 집안의 남자 네 명을 하루 아침에 잃었습니다. 서울에 살다 미처 피난을 못 간 상태에서 납치되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 때 수녀님은 서울대 화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김 수녀님은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 24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부산까지 피난하여 온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던 아버지와 오빠들을 잃은 김 수녀님은 어떻게 하느님이 한 가족에 이런 재앙을 쏟아부으실 수 있는지 너무 충격이 커서 거기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해방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갈등과 혼란을 거듭하다가 이런 참극을 일으킨 이 땅이 너무나 싫었고 여기서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진명 여고 시절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미사참례도 다니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했고, 수도생활에 대한 꿈도 어렴풋이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빠 셋을 한꺼번에 빼앗기는 비극을 겪으면서 믿음도 흔들리고 수도생활에 대한 꿈도 다 접었습니다. 오직 이 저주 받은 땅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 가서 삶의 터전을 잡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려가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한국을 떠날 때, 자신의 마음속으로 이 땅을 다시 밟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아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 연학 과정 중에 그곳에서 노틀담 수녀님들의 따뜻한 배려와 친절을 접하면서 흔들렸던 믿음을 회복하고 수도성소에 대한 불씨를 다시 살려내었습니다. 수녀님이 나중에 회고한 글에서 보면 자신이 미국에 간 것은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것인데 하느님께서 다시 붙잡아 데려오셨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연금술사가 금을 더욱 순수하게 제련하기 위하여 불에 한참 달구듯이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운 보화로 만들어 주시려고 시련을 주신다고 합니다. 김 수녀님도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와 오빠 셋, 그리고 나중엔 동생까지 폭력에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면서 수녀님은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희망을 달구어 내는 단련의 세월을 살아내신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김 수녀님은 박사 과정을 다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어딘가 잘 못되었다는 느낌, 이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다시 하느님의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성심 수녀회에 입회하여 미국에서 첫서원을 하고 교편생활을 잠시 하시다가 한국으로 파견되어 나오셨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성심회 첫 번째 회원으로 오신 김 수녀님은 성심여자 고등학교 교장, 성심여자대학을 세우는 일을 해내시고 많은 성심 동문을 키워내시며 오늘의 성심 수녀회의 초석을 다지셨습니다.
지난 1월25일 나는 병원에서 많이 허약해지신 김 수녀님을 뵈었습니다.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물도 아주 조금밖에 삼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래도 정신은 또렷하여 목소리는 가늘지만 말씀은 또박또박 하셨습니다. 수녀님은 이제 당신의 마지막이 임박하였음을 잘 알고 계시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통증으로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주사 맞아서 별로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마음속에 원한이나 미움 같은 것이 없는데 이런 상태로 괜찮은지 모르겠다는 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속의 응어리 같은 것이 있으면 다 풀고 용서하여야 자신도 하느님의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은 별로 마음속에 맺힌 것이 없는 것 같아 이대로 괜찮은지를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어쩌면 지독한 통증을 주실지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그런 통증도 안 주시고, 정신적으로도 크게 뉘우침이나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도 안 주시고 믿믿하고 평탄한 마지막 길을 걷게 하시는데 이래도 괜찮은지를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수녀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이미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원망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 안에서 소화하고 삭히면서 충분히 용서하고 용서받는 과정을 살아내셨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수녀님과 작별하기 전에 묵주기도를 잠시 함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런 염려 마시고 하느님께 다 맡겨드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수녀님이 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다 되었으니 의사한테 그만해도 된다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수녀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나 하고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수녀님 뜻도 있고 해서 일체 병원에선 연명을 위한 조처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무슨 말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김 수녀님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의구심이나 초조, 불안 같은 것을 다 극복하시고 평화로워지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에 ‘이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말씀과 비슷한 마음이 아니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녀님을 하느님 곁으로 떠나보내는 동료 수녀님과 유가족 여러분, 김 수녀님은 다 이루고 가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cafe.daum.net/enneagram97 에니어그램97 에서 퍼옴...감사..^^
- 실제 이 글은 김숙희수녀님이 강주교님께 원고를 직접 받아 컴퓨터로 쳐서 화일로 만들어 올려져 퍼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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